파일 올린 시간 : 2019년 10월 15일 15시 09분 06초

아프리카(53) 빅토리아 호수

모처럼 학교일로 캄팔라를 다녀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 눈을 들어보니 그림같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빅토리아 호수였다. 그렇게 운전을 잘하는 조렘이 실수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예 호숫가에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끝없이 펼쳐진 호수는 마치 바다같았다. 태어나서 한번도 호수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원주민들도 이 호수가 바다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 호수는 크다. 호수의 크기는 609,500평방 제곱 킬로, 얼마나 큰가를 말하려면 남한의 70%라고 말하면 된다. 우리의 충주호, 소양호도 큰데 이 호수는 강원도를 뺀 나머지 남한 전체의 크기와도 같다.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세 나라가 이 호수와 접촉하고 있지만 이 호수때문에 가장 많이 덕을 보는 나라는 우간다다. 우간다의 관문인 엔테베 공항이 이 호숫가에 있고 수도 캄팔라도 이 호수로 부터 시작된다. 또 여기서 흐르는 물이 백나일강의 수원지가 되어 6,650 킬로를 흘러 우간다, 수단, 이집트를 통해 지중해로 흘러간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여기 있는 다른 이유도 있는가? 빅토리아호수는 왜 아프리카의 한 복판에 있으며 나는 왜 여기 와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가? 한참 호수를 바라보다가 문득 에스겔의 환상이 떠올랐다. 포로시대, 민족의 태반이 끌려가 노예가 되고 시드기야 왕마저 끌려가 바벨론 왕앞에서 눈이 뽑히던 날, 에스겔은 그발강가에서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그 물이 시내가 되고 강이 되다가 마지막에 바다를 살리는 환상이었다.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리라...'(겔47:9-12).

물의 환상의 시작은 아마도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일 것이다. 하나님은 동산에 강을 만드시고 네 방향으로 흐르게 하셨다. 창2:10이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에덴은 생명의 근원이 되었고 물은 에덴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갔다. 그 강은 신약에서 생수이신 예수님을 통과한 후  계시록에 이른다. 계시록 마지막장에 나타난 강은 결국 만국을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되...'(계22:2).

나는 선교를 꿈꿀 때나 선교사로 떠나기 전까지 한번도 아프리카를 선교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선교 1년 전인 작년 초에도 케냐를 다녀왔지만 내가 다시 아프리카로 오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다른 사람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가보고는 싶은데 모기, 말라리아때문에 무섭고, 슈바이처, 리빙스턴 때문에 호기심은 생기는데 더위와 불편을 참아낼 것 같지 않은 나라, 그래서 잘하면 단기 선교 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아프리카로 오게 되었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나였고 더 놀란 것은 내가 지금 그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내가 여기 산다면 한국인 누구나 살 수 있다). 더구나 그 중에서도 우간다는 더욱 상상을 못했다. 그 많은 나라중 하필 독재자 이디 아민의 나라인가?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각은 항상 옳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살면서 점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고 있다. 그것은 우간다는 기독교적 미래를 준비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라다라는 것이다. 우선 인구 70%가 기독교다. 다른 나라에 많은 무슬림이 이곳에는 적다. 그래서 종교간의 갈등이나 핍박이 없다. 기독교 지도자나 선교사에 대한 인식도 좋다. 가난한 것이 흠이지만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가난해서 잘못된 적은 없다. 배움의 기회가 없어 학력수준은 낮지만 배우려는 열정은 높다. 19세 미만의 다음 세대가 인구의 60% 이상이다. 정부 정책으로 목사는 반드시 대학(학사)을 마쳐야 한다는 정책이 지금 실행중이다(곧 르완다처럼 학사 이상 아닌 목회자의 인가는 취소될 때가 올 수 있다). 그러니 마음껏 가르칠 수 있다. 이만한 조건을 갖춘 아프리카, 아니 세계 어느 나라도 찾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간다는 빅토리아 호수의 사명을 받은 나라다. 먼저 안으로 자기를 적시고 밖으로 흘러가는 호수, 호수의  물은 모여  있기 때문에 흘러가고 흘러가기 위해 모인다. 하나님이 우간다를 만든 것은 빅토리아 호수를 만든 이유와도 같다. 'Come to learn, go to serve'. 인도의 어느 초등학교 교문에 쓰여 있던 표어다. 우리는 배우기 위해 왔지만 또 섬기기 위해 가야 한다. 'Passion for God,  compassion for the lost'. 하나님에 대해 열망을 가진 사람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연민도 가져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에 선교사를 보낸 미국 어느 교회 강단에 붙어 있던 표어다.

그렇다. 물은 모이기 위해 있고 또한 흐르기 위해 있다. 영성과 선교는 우리가 존재하는 두 가지 이유다. 빅토리아 호수처럼 맑은 호수가 되고, 빅토리아 호수 처럼 풍성한 물을 세상에 흘러보내기 위해 우리는 산다. 오늘 우리가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서 키운 사람들이 아프리카 54개국으로 흘러 가고 그 물이 넘쳐 영국, 유럽, 인도, 세계의 메마른 땅으로 흘러가 기필코 그 땅을 적시는 날을 볼 수 있을까? If we do possible, God will do impossible. 오늘 우리가 가능한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하실 것이다. If we do the first, God will do the rest.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작은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은 나머지 큰 일을 이루시지 않을까?

오늘 조렘의 실수는 하나님의 성공이었다. 빅토리아 호수를 뒤로 하며 하나님의 생수로 세상을 적실 영광스런 날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 덥고 모기가 많은 아프리카의 작은 시골 마을로 향하였다.

아프리카(54) 책읽는 사람, 책이 된 사람

요즘 학교에서 심심찮게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책을 들고 다니거나 책을 읽는 사람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그렇다. 쿠미대학은 무슨 행사때 입는 성가대 가운같은 유니폼이 있다. 그런데 학생들은 자기가 대학생인 것이 자랑스러운지 더운 날씨도 그것을 입고 다닌다. 그런데 요즘 성가대 가운 사이로 묵직한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가끔 보인다. 누군가 하고 보면 영락없이 신학부 학생들이다.

지난 학기 학생들을 받아 처음 신학의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팟던 것은 학교에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명색이 대학생인데 책이 없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어떻게 하든 이들에게 책을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떻게 책을 구할 것인가? 이럴줄 알았으면 내 책을 나눠주지 말 것을... 작년 말 나는 내 책 2만권을 재고 정리했다. 한 권 한 권 피땀흘려 모은 책이었다. 책이 많았지만 나와 무관한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전집은 매달 월급에서 살같이 깍아 주었고 단권은 점심을 굶으며 샀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는 정말이지 책 한 권 살 때마다 몇 번을 망설이곤 했다. 그런데 그 책을 몇 십명의 목회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떤 목회자는 감사하다며 마치 전리품처럼 봉고차에 싣고 갔는데 나는 사라지는 봉고차를 보며 내 생명같은 자식들을 빼앗긴 것 같았다.

그러다 약 한 달 전에 캄팔라에 있는 한 선교사가 나에게 최신 정보 를 제공해 주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가끔 선교적 차원에서 헌 책을 큰 배로 보내는데 내일 그 책이 오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캄팔라로 차를 몰았다. 시간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밤늦게 도착해서 자고 이른 아침 서점으로 달려갔다. '코카스'라는 서점이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도 잡는다는 말이 맞는가? 대부분 오래된 책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좋은 책으로 인정받는 책들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강해설교가 마틴 로이드 죤스, 복음적이면서도 학문적인 존 스토트, 그리고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시.에스. 루이스의 원본 책들이 거기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책이 228권, 나는 정말 그 책을 가지고 쿠미로 올 때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신학교에 도서관이 시작된 것이다. 그 책을 정리한 후 30권을 선별했고 그 30권중에  각자 10권을 택해 이번 학기 필독서로 삼기로 했다. 생전 제대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10권이라니, 나는 이렇게 학생들을 괴롭히는 재미로 산다. 학과 공부하랴, 책읽으랴, 학생들은 고통중에 절규하고 나는 그 절규를 보는 것이 너무 좋다(하나님도 가끔 그러신 것 같다).

그리고 말했다. '미국의 시카고대학이 단일 대학으로 왜 노벨상을 90개나 받은지 아는가?(현재까지 독일 전체가 받은 89개보다 많다). 그 이유는 독서 프로그램 때문이다. 이 학교에 들어가면 전공과 상관없이 학교가 정한 고전과 인문도서를 읽어야 한다. 유대인 속담을 아는가? '수염이 있다고 랍비는 아니다'. 그렇다. 수염은 랍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염소도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누구인가?  '목숨걸고 책 사는 사람'이다. '목숨걸고 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안수받았다고 목사가 아니라 책 읽는 사람이 목사다. 책 읽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신학교를 그만두면 된다. 책 안읽는 목사가 되기 보다 책읽는 평신도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렇다. 나는 학생들이 남들 에게 보이기 위해 가운을 걸치고 다니는 것보다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책 읽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

그리고 차제에 내 책을 한 권이라도 가져간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혹시 이윤재 목사 책을 가져간 목회자가 있다면 이것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당신들이 나에게 가져간 것은 단지 책이 아닌 것을 명심하라. 그 많은 책의 어느 책도 내 손때가 안 묻은 책이 없으며 내 젊은 날의 가난과 꿈과 눈물이 배이지 않은 책은 없다. 당신들이 가져간 책은 헌 책방에서 도매로 구입한 책과 다르다. 내 작은 책 한 권에서 목회에 대한 서투른 사랑의 고백과 여름같은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쓰레기를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먼 훗날, 목사가 남에게 책을 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평생에 걸쳐 모은 책을 내놓을 때 왜 그것이 아픔이고 왜 그것이 기쁨인지 알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소유욕과 우상숭배로 무너져가는 한국교회의 유일한 출구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내 작은 분신이 지금도 당신의 서재에 있다는 것이 기쁘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 당신도 뭔가를 주고 내려오는 것이다. 그것이 꼭 책이 아니어도 좋다. 그리하여 진짜 좋은 책은 종이로 된 책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한 책이요 그래서 가장 좋은 책은 당신 자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책을 읽으면 책은 사람을 만들고 당신은 결국 책이 될 것이다''(탈무드)

아프리카(55)  왜 낙심하는가?

왜 우리는 사역하면서 자주 낙심하는가? 낙심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두 주전 이번 학기 과목중의 하나인  '교회와 영성' 시간이었다. 학생들에게 마틴 루터에 대해 아는 사람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이상하게 조용하더니 한참 후에 한 학생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마틴 루터가 누구죠?'. 나는 그 질문을 받고 한참을 당황했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인가 했다. 그런데 장난이 아니었다. 이들은 그날 루터를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루터만 처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어거스틴, 칼빈, 웨슬리도 이들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평소 설교만 잘 들었어도 알 사람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반 역사는 다르겠지 생각하고 물었다. '그러면 컬럼버스, 나폴레옹, 죠지 와싱턴은 누구죠?'. 놀랍게도 이들중에 이들을 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의 성향상 웬만하면 안다고 할 사람들이었다. '와싱턴'이 미국에 있는 도시라는 것은 더러 알았지만 그것이 사람 이름인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더 놀란 것은 바로 옆 나라(콩고는 우간다 옆에 있다)에서 선교했던 유명한 슈바이쳐도 처음 듣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날의 충격은 다음에 받은 충격의 시작에 불과했다. 학생들이 채플을 위해 함께 합창을 준비했다. 모처럼 4부로 불러보자고 모두가 아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악보를 나눠주고 찬양을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항상 틀리는 데서 틀리는 것이었다. 왜 악보를 보고도 틀리냐고 묻자 한 학생이 말했다. '악보가 뭡니까?'. 놀랍게도 그들은 악보를 볼 줄 몰랐다. 그들은 악보를 들고 있었지만 악보를 보고 부른 것이 아니라 외어서  부르고 있었다. 부점, 쉼표, 되돌이표는 그들에게 작은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아!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기초가 안되어 있으니.... 중고등학교에서 음악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묻자 음악은 선택과목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역사는?

나는 그동안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리 낙심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받기만 하고 쉽게 의존하며 자기는 안하고 게으를 뿐 아니라 책임도 지지 않는...이런 것들은 오랜 식민지 생활과 가난이 빚어낸 불행한 역사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물론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날 이들의 상식밖의 무지는 나를 크게 당황하게 했다. 문제는 내가 이들을 데리고 아프리카 복음화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파송하여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꿈도 야무지지 않는가? 도대체 이 일이 가능한 일인가? 나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선교의 사실과 진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8개월 만에 나는 장미빛 유토피아와 현실 선교사이의 무거운 경계선을 넘나 들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도덕적 실수는 용납할 수 있지만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무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들을 잘못 본 것인가?

내가 너무 쉽게 아프리카를 믿은 것은 것인가? 사실 이들에게 가장 큰 가난은 물질적 가난이 아니었다. 더 큰 가난은 사고의 가난이었다. 생각과 지식과 관점의 가난, 이것은 쉽게 변화될 일이 아니었다. 며칠동안의 침잠은 나를 말라리아 직전까지 몰고 갔다. 학교를 며칠 거른 채 들길을 걷고 걸었다. 이들에게 희망은 무엇인가? 과연 이들에게 희망이 있는가?

낙심이 깊어가던 어느날 나는 문득 무거운 내 여행가방속에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기억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이었다. 무거운 가방에 억지로 집어 넣은 책이었다. 가방을 헤치고 책을 꺼냈다. 책을 펴자마자 책은 다음의 글로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날 하나님께 '함께'하는 사역자는 적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가 많은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 보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망각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 실망은 사실 다른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있는 우리 자신에게서 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책은 나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사역자의 낙심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라고 보냄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전쟁에서 도구가 되라고 부름받은 것이다'(도움의 장소). 그의 이야기를 빌리면 우리가 사역에서 낙심하는 것은 사역지에서 만난 사람들때문이 아니라 '소명'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다. 소명은 내가 원하는 일(want to do)을 하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내가 할 수 있는 일(can to do)을 하는 것도 아니다. 소명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should to do)하는 일이다. 따라서 소명은 내가 사역하는 사역지의 환경과 무관하다. 소명은 본질적으로 사역지의 환경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과 관계된다. 따라서 나는 사역지의 환경이나 사람을 평가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내가 그렇게 하는 순간 나는 소명에서 벗어나 자원봉사자가 된다.

소명은 사역에 대한 나의 선호나 기호, 관심, 심지어 사랑과도 관련이 없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 그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보내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사랑안에 머무는 것이다. 내가 그의 사랑안에 머물면 사랑하시는 분은 그 분이다(요일4:16). 열매도 그렇다. 사역자의 열매는 사역의 목적이 아니라 사역의 결과다. 우리는 열매맺기 위해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거하면 그가 열매맺게 하신다(요15:5). 우리는 우리가 그를 '위해' 일하기를 바라지만 그는 우리를 '통해' 그가 일하기를 원하신다. 사역은 '우리를 통하여 그가 하신 일'이요, 성화는 '우리안에 계신 그 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그 분의 선하심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충만하여 우리가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사역하는 것이다(고후5:14).

그렇다. 이 책은 낙심의 우물에 빠진 나를 끌어올린 영혼의 두레박이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저들은 오늘도 악보를 들고 틀리게 부르고 있었다. 앞으로 나는 얼마를 더 그들이 틀리게 부르는 노래를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 들은 노래는 지난번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틀린 노래가 오늘따라 참 은혜롭게 들렸다. 하나님앞에서 말도 안되는 질문도 상당 기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의존적인 모습도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과 순종을 통해 그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기 있다.
...

당신은 어떤가?

아프리카(56) 가장 좋은 때

지금 우간다는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지만 대략 10월부터 3월까지는 건기이고, 4월을 지나면서 조금씩 우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 우기라고 해서 비만 오는 것은 아니다. 간간이 낮에 내리는 비(욱비: 욱하고 내리는 비)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밤에 내리는 비(꽝비: 꽝하고 내리는 비)로 날씨는 생각보다 시원하다. 반면 건기는 무척 덥다. 한국같은 찌는 더위는 아니지만 뭔가 머리를  혼곤하게 하는 강렬한 더위이다.

더위로만 보면 당연히 우기가 좋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말 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음식이다. 우기는 비가 와서 좋은 데 먹을 것이 많지 않다. 이유는 대부분의 곡식을 이때  심기 때문이다. 주식인 카사바를 비롯, 콩, 옥수수, 고구마, 감자를 심는 때가 이때다. 간밤에 내린 비로 함초롬히 젖어 있는 곡식들을 보면 정말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 곡식을 먹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날씨가 더워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인생살이가 꼭 날씨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 덥긴 하지만 여름에 수확한 알이 꽉찬 고구마가 창고에 가득한 것을 본다면, 망고, 아보카도, 패션 플릇등 한국에서는 비싼 과일들이 여기 저기 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면 여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간다와 시간은 다르지만 이스라엘도 겨울(11-2월)에 심고 여름(3-10월)에 거두는 것은 같다. 이스라엘의 밀과 보리는 비가 오는 11-12월에 심는다. 그것이 4-5월(소위 초실절, 맥추절)에 수확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성경의 사람들은 2-3월(춘궁기)을 힘들게 보냈다. 겨울이 되어 시원하기는 한데 먹을 것이 떨어져 여름을 기다려야 하는 계절의 특성은 성경 여러군데에 나타난다. 소위 가나안 7대 소산이라 불리우는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 종려(신8:7-8)는 예외없이 뜨거운 여름에 수확된다. 가장 대표적인 과일인 포도는 유월에서 팔월에, 감람은 그 보다 조금 늦게, 무화과는 거의 연중 무휴로 열리지만 최상의 무화과는 유월에서 구월에 열린다. 단맛이 많이 나고 탐스러운 과일일수록 여름의 한 복판을 지나야 한다.

이 두 계절의 존재는 이미 창세기에 나타난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노아 홍수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옛날에도 이스라엘에는 두 계절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같다. '차겁거나 뜨겁든지 하라'(계3:16)는 성경의 메시지가 영적인 메시지만이 아닌 이유가 이 때문이다. 전도서도 두 계절의 존재를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전3:2-4).

문제는 그 속에 우리가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뀌지 않은 계절을 보고 매일 일희일비하고 산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항상 좋은 때가 있는가? 우기는 비가 와서 시원한데 먹을 것이 적고 건기는 너무 더운데 먹을 것이 많을 뿐이다. 더위를 싫어하는 사람은 당연히 우기가 좋겠지만 배고픈 사람은 여름이 좋다. 이 이야기를 학생들과 나누다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먹을 것은 적어도 시원한 게 나은 사람은 약 20명 중에 12명이었다. 더워도 먹을 게 많은 게 좋다는 사람은 8명이었다. 먹는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닌 사람들은 시원한 우기가 좋다고 했지만 같은 질문을 자식들을 먹여야 하는 부모들에게 물었다면 아마 여름이 더 좋다고 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 두 가지가 다 갖춰진 때는 있을까? 목회도 매일 기쁨과 함께 고통을 동반한다. 어느날 목회로 힘들어 하는데 브라질에서 선교하는 친구 선교사가 삼바티를 입고 나타났다.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나도 언제 저렇게 자유로와 보나? 다 그만두고 선교사로 나갈까?' 그런데 같은 시간 브라질 선교사는 친구의 넖고 큰 사무실에 감동받아 목회자가 부럽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짐은 무거우나 안정감이 있는 담임목사가 좋은가? 조금 힘들지만 자유로운 선교사가 좋은가? 목회자중에 어렵게 학위를 마치고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는 친구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일찍 공부하러 나갔으면 저렇게 되었을텐데'. 그러나 같은 시간 그 친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나도 일찍 목회를 시작했으면 저렇게 자리를 잡았을텐데' . 목사로서 평생 소원중의 하나가 이집토 안토니 수도원에 가보는 것이었다. 꿈은 이루어져 드디어 지난 8월에 방문했다. 그러나 솔직히 가슴이 뛰었던 순간은 공항에 도착한 순간뿐이었다.

너무 덥고 먹는 것이 힘들어 내가 왜 일주일씩이나 여기 왔을까를 생각하다 내려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살았던 분들이 그리워진다. 법정 스님의 말이 맞다. '절에 있으면 집 생각이 나고, 집에 있으면 절 생각이 난다'.

우리의 삺에 항상 좋은 때는 있는가? 성경에 때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어떤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은 없다. 대신 이 말씀은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3:11).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He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his time'(하나님이 그의 시간안에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셨고). 그렇다. 시간은 '그의 것'이다. 우기도 건기도, 먹을 것이 없으면 비를 주시고, 날씨가 더우면 먹을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은 그 분이다. 그의 시간안에서 우리는 은혜로 아름답게 살 뿐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본원적인 아름다움이란 없다. 가장 좋은 때는 따로 오지 않다. 우리가 그 분안에 있으면 모든 때가 아름다울 뿐이다. 공연히 바꾸지 못하는 계절을 탓하지 말자. 날씨도 좋고 먹을 것도 많은 때는 없다. 공연히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보고 속상해하지 말자. 아직도 오지 않은 때를 막연히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지 말자. 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절에 있는가? 집을 그리워하지 말자. 집에 있는가? 공연히 절 생각하지 말자. 그가 지은 시간안에서 우리에겐 모든 때가 아름답다. 형통할 때는 즐거워서 아름답고 곤고할 때는 기도해서 아름답다(전7:14). 비가 오는 날은 시원해서 아름답고 더운 여름날은 먹을 게 많아서 아름답다. 때가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때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