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81)
내가 깊은 곳에서

아직도 채 끝나지 않는 전쟁터에서 폭풍처럼 지나간 고난의 정체를 급하게 추적하며 그가 흩끗 남긴 뒷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급하게 몇 자 적을 필요를 느낀다. 우리에게 고난은 왜 오는 것이고 고난이 올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책으로 공산당을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당을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스탈린의 딸 이오시프가 성인이 된후 소련내 미국 대사관에 망명한 후 한 말이다. 그렇다. 고난도 책으로 배우면 욥의 세 친구같은 얼치기 철학자가 되지만 몸으로 고난을 배우면 욥같은 정금같은 신앙인이 되는지 모른다. 누구나 고난에 대해 말할 수 있으나 고난은 그렇게 쉽게 몇 마디로 끝낼 간단한 주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내 경험이 모든 고난에 대한 해답이라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이야기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모리카라 우리 집 앞에는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어느날 잎파리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날부터는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아니 한국처럼 가을도 아닌데 왜 잎파리가 떨어질까?" 항상 여름밖에 없는 아프리카에서 떨어지는 낙옆을 보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떨어진 낙옆이 자동차 위에 수북히 쌓였다. 그런데 같은 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계속 낙옆이 떨어졌는데도 나무에 잎은 그대로 붙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 분명 잎이 떨어졌는데 잎은 그대로 있다니. 나무 아래 서서 푸른 하늘을 덮은 나무잎을 경외심으로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떤 신비감에 사로잡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무잎이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고난이라고 부르고 혹은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새 잎이 생기는 것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둘이 하나였다. 우리가 매일 보는 것은 떨어지는 낙옆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우리는 고난이 어떻고 인생무상이 어떻고 하고 말하지만 나무잎은 떨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기는 것이었다. 이 죽음과 생명 을 누가 동시에 주관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시다. 고난은 아프고 죽음은 슬프지만 크게 보면 역사는 그리고 우주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고난과 죽음을 나와 관련시켜보면 큰 일이지만 하나님과 관련시켜보면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죽어야 문제인데 하나님이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설령 내가 죽어도 그 자리에 또 새 생명이 잎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걱정하는가? 왜 우리는 떨어지는 낙옆만 보고 날마다 새로 피는 잎은 보지 못할까? 그날 모리카라의 나무는 고난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 열쇠를 나에게 선물로 준 것 같았다.

말라리아로 인한 고난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병원에 도착하여 며칠동안 나는 거의 매일 잠에 취하여 정신없이 지냈다. 그 잠은 삶과 죽음사이를 오가는 긴 터널같은 것이었다. 나는 눈만 감으면 고향 마을로 달려갔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집짓고 사는 어릴적 살던 집은 내가 태어나서 살던 시골집 그대로 살구나무, 복숭아 꽃이 피고 그 한 가운데는 내 동생이 빠져 죽을 뻔한 우물도 있었다. 그런데 그 옛날 집 주변에는 내가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시차없이 함께 나타났다. 어릴적 친구도 나타나고 지금은 멀리 이민간 경아 식구도 나타났다. 나를 업어 키운 둘째 고모도,  그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도,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오래 본 것 같은 사람들도, 이중표목사님도 나타났고 딱히 누군지는 알 수 없는 수많은 교인들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는 비몽사몽간에도 내가 죽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확실히 깊은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깊은 골짜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 점점 세상과 멸어져 가는데 나는 그렇게 평안할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성경귀절이 있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1:21). 아, 나는 그때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의 간격이 그렇게 가깝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죽음은 전혀 이상한 앨리스의 나라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우리와 함께 있었다. 문제는 죽음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혼자 간다는 것이었다.

골짜기는 이스라엘에서 통과하는 곳이지 집짓고 사는 곳이 아니다(시23:4). 하나님의 사람들은 골짜기를 통해 높은 산에 오른다. 요셉이 인생 구덩이를 통과해 애굽총리에 올랐다. 사도 바울도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통해 삼층천에 이르렀다. 골짜기없이 축복만 말하는 사이비 기독교를 경계하라. 그래서 요즘 하나님은 이단 사이비 신천지를 사정없이 타작하고 계신다. 신천지가 다 거짓이지만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바로 영생한다는 교리야말로 성경 최고의 원수적 주장이다. "우리는 죽어요. 그런데 안죽어요". 이것이 기독교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는 영원히 안죽어요"라고 주장한다. 깊은 골짜기를 부인하는 어떤 주장도, 깊은 곳을 통과하지 않고 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어떤 교리도 이단이다. 문제는 우리가 깊은 곳으로 갈때 주님이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아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130:1). 골짜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천국은 깊은 곳을 통과해야 도착한다. 예수님도 힌놈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겟세마네로, 골고다로. 마지막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 우리가 깊은 곳에 있을 때 주님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함께 하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운 것은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 주님없이 혼자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아닌가?

아프리카(82)
죽는 곳이 사는 곳

죽음의 문턱에서 잠시 깨어난 사이,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 적이 있다. 아마 두 가지 이유때문인 것 같다. 하나는 드디어 내가 죽을 곳을 찾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선교사로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된 은혜의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때는 지금부터 120년 전쯤 되었을까? 그때는 언더우드와 아펜셀라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될 때였다. 당시 우리 증조 할머니는 40대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로 4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유난히도 가난하던 시절, 할머니가 살았던 지리산 함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여자 혼자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생활력이 강한 할머니는 어떻게 네 남매를 데리고 살까 궁리하다가 함양-남원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식당 하나를 차렸다. 말이 식당이지 아마도 그곳은 밥도 팔고 막거리도 팔고 한쪽 방은 대충 치워 손님도 재우는 주막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한가한 이 마을에 어느날 말타고 갓을 쓴 한 외국인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이 낯선 외국인에게 정성을 다해 음식을 대접하고 어두어지자 이부자리도 깔아 드렸다. 낯선 손님은 다음날 아침 감사하다며 무슨 책 몇 권을 놓고 떠났다. 학교를 못 다닌 할머니는 글을 잘 읽지 못해 자식들에게 읽어보라고 했는데 자식들은 더듬거리며 "마가복음", "누가복음"이라고 읽었다. 낯선 사람은 미국 선교사였고 그가 놓고 간 것은 쪽복음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며 자녀들이 더듬거리고 책을 읽고 있던 얼마후 이 외국인이 또 나타났다. 할머니는 그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며 이 책은 무슨 책입니까?". 그때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온 선교사라고 말하고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했다. 할머니는 선교사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고 네 남매도 함께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후 전주에 신흥학교라는 미션스쿨이 생겨났다. 교육열이 강한 할머니는 자식들중 그래도 공부 좀 할만한 자식 하나를 신흥학교에 보냈는데 그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다. 그 이후 할아버지는 고향에 교회를 세웠고 자신의 형을 초대 영수(장로)로 세웠다. 함양, 남원지역의 복음은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어릴때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막연히 선교사는 무엇하는 사람이며 왜 그 먼나라에서 한국까지 왔을까하고 묻고 또 물었다. 한국으로 온 것도 신기하지만 그는 왜 서울같은 대도시로 가지 않고 지리산 같은 시골로 다니며 전도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마 그 당시는 강을 따라 육지로 접근하던 때라 추측컨대 남해안에서 섬진강을 따라 올라와서 지리산 근처에서 말로 갈아 타고 지리산을 거쳐 남원, 전주로 이어지는 전도 여행을 그가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나는 자라면서 이 이야기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가정과 지역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 그는 우리의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그래서 각방으로 그가 누구였을까 탐문했는데 현재까지 그가 미국 죠지아 출신 남장로교선교사 였을 것이라는 것만 확인되었다. 몇 년 전 안식년때 아틀랜타를 방문했을 때 죠지아주 브랙마운틴에 가면 옛날 한국에서 활동하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정상 찾아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것은 두고 두고 후회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가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와보고 낯선 나라에서 죽음의 문턱앞에 서보니 왜 그렇게 이름모를 그 선교사님 생각이 사무치게 그리운지 눈물이 쏟아졌다. 복음의 역사가 그냥 쉽게 이루어진지 알았는데 이렇게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을, 그나마 120년에 생명걸고 태평양을 건너 가난하고 몽매한 나라에서 말타고 다니며 고생했을 선교사님이 생각나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내가 택한 이 길이 정말 잘한 선택이며 나도 먼훗날 아프리카 사람들이 기억할만한 선교사가 될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선교사님!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그리워 합니다. 그렇게 이국만리 먼 곳에 와서 고생하셨어도 우리는 당신의 이름도 모르니 우리는 참 무심한 백성입니다. 당신이 전도한 그 할머니 한 사람은 우리 가문의 루디아가 되고 그 뿌리에서 수많은 목회자, 장로, 신자, 교회, 학교, 순교자가 생겼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제가 이 모두를 대표하여 낯선 땅 아프리카에서 순교할테니 우리 꼭 천국에서 만나요. 그때 저는 선교사님을 몰라봐도 선교사님은 저에게 오셔서 내가 네 증조 할머니에게 전도한 선교사라고 말씀해 주세요.
선교사님, 당신의 가족들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자녀들도 이미 다 천국에 있겠죠? 제가 약속드릴 것은 제가 살아 있는 한 꼭 당신의 후손들을 찾을 것과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이름도 빛도 없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이곳에서 순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기때문입니다. 바로 주를 위해 죽는 그곳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